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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진관 예조 판서 유지가 아뢰기를,

 "성안에 요귀(妖鬼)가 많습니다.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의 집에는 귀신이 있어 능히 집안의 기물(器物)을 옮기고, 호조 좌랑(戶曹佐郞) 이두(李杜)의 집에도 여귀(女鬼)가 있어 매우 요사스럽습니다. 대낮에 모양을 나타내고 말을 하며 음식까지 먹는다고 하니, 청컨대 기양(祈禳)하게 하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홍응이 대답하기를,

 “예전에 유문충(劉文忠)의 집에 쥐가 나와 절을 하고 서서 있었는데, 집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유문충에게 고하니, 유문충이 말하기를, ‘이는 굶주려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다. 쌀을 퍼뜨려 주라.’고 하였고, 부엉이가 집에 들어왔을 때도 역시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는데, 마침내 집에 재앙이 없었습니다. 귀신을 보아도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저절로 재앙이 없을 것입니다. 정창손의 집에 괴이함이 있으므로 집 사람이 옮겨 피하기를 청하였으나, 정창손이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비록 죽을지라도 어찌 요귀로 인하여 피하겠느냐?’고 하였는데, 집에 마침내 재앙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부엉이는 세상에서 싫어하는 것이나 항상 궁중의 나무에서 우니, 무엇이 족히 괴이하겠는가? 물괴(物怪)는 오래 되면 저절로 없어진다.”

 하였다. 유지가 아뢰기를,

 “청컨대 화포(火砲)로써 이를 물리치소서.”

 하니, 임금이 응하지 아니하였다.

<성종실록 17년 11월 10일>



​영의정 정창손 집에 귀신 있다는 얘기가 궁중 조회에서까지 나오니

그거 듣던 예조판서가 ​​그럼 거기에다 대포 함 쏴보자고 성종한테 의견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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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상화란 땅이 물처럼 되는것을 의미하는데

진동으로인해


동영상처럼 물이 위로올라오고 물체가 가라앉는등 다양한 현상이 일어남


지진으로인해 땅이 흔들리게되면?



이렇게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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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있는 로마의 다리.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지은 것(기원전 27년~기원후 14년)으로 추정되며


고대 및 중세 유럽인들은 로마가 망한뒤 이 다리를 보고


인간이 이런걸 지을수 있다는 걸 믿지 못해서 악마의 다리(Pont del Diable)라고 부름.


 


로마제국이 망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타라코라는 도시로 15km 떨어져있는 강에서 물을 끌어오는 용수로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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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3월, 태평양 중서부 마셜제도의 동남쪽 끝에 위치한 밀리 환초(Mili Atoll, Mille Atoll)에 일본군에 의해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던 한국인노동자들이 밀리 환초 내 치루본섬에서 한국인들을 감시하던 일본인들을 살해하고 미군에 투항할 계획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날, 반란 과정에서 달아난 일본군의 제보로 일본군 토벌대가 다른 섬에서 건너와 반란을 일으킨 한국인노동자들을 집단 학살하였다.



사진 설명에는 193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군)의 노예생활에 반발하여 반란(revolt)을 일으켰으며, 68명의 생존자를 미 해군이 구조했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이는 간접 증언 등을 토대로 알려져 있어 진위여부가 불확실했던 한국인 노동자들의 반란 사건이 실재하였음을 확인해주는 사진 기록이었다.

일본측 문서는 밀리 환초에 강제 동원되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을 '군무원'으로 분류하고 있어 이들을 일정한 대우와 임금을 보장받는 사람들로 오해할 소지가 있지만, 미군의 구조 사진에서 확인되듯이 조선인 노동자들은 강제노역과 굶주림에 시달려 피골이 상접한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들은 강제동원으로 끌려와 당시 미군이 표현했던 것처럼, '노예노동자(slave laborers)' 상태였다. 

미 해군에 의해 구조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밀리 환초 인근 마주로 환초에 체류하다가 하와이포로수용소로 보내졌고, 1946년 1월에 일본 우라가에 머물다 그 해 2월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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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잉국 엠블턴에서 태어난 William T. Stead는
잉국 빅토리아 시대의 유명한 언론인이었음.

오래전 사람인만큼 언론인으로서 여러가지 업적을 가지고 있는데
몇가지를 소개해보자면 최초로 여성기자를 고용한 사람이고,
19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문제였던 매춘굴과 음주굴의 실태를 알리고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도록 활발히 알렸던 사람임.

62세이던 1912년에 그는 타이타닉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데,

안타깝게도 타이타닉 침몰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오른쪽 맨 밑 비뚤어진 네모 사진이 William T. Stead)
그는 1등석의 저명한 언론인인데다가 노인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구조될 수 있었지만
구명정에 다른 승객들이 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자신의 구명조끼를 건네주는 등
마지막까지 여러 선행을 한 후 흡연실에서 독서를 하다가 익사했다고 함.



그러나 그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하게 평가받는 것은
언론계에 최초로 인터뷰 기술을 도입했던 일

그는 그가 고안해낸 그 인터뷰 기술로 1907년, 우리에게 친숙한 사람을 인터뷰하게 되는데

바로 헤이그특사의 이위종 열사를 인터뷰했음 (맨 오른쪽)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로 보내진 헤이그 특사는 대한제국의 사절단으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입장하려고 했으나 실패.
러시아 정부에서 대한제국의 사절단들은 입장시키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

세 사람은 의장한테까지 찾아가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설명하고 들여보내달라고 했음.
의장 개인적으로는 동정했지만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서 결국 실패

이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William t. Stead가
헤이그 특사 중 한명이었던 이위종 열사를 인터뷰하고

만국평화회의보에 그 내용을 헤이그 특사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실어버렸음.

이 덕분에 세사람은 언론전에 귀빈으로 초대받아 연설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위종 열사가 영어 독어 불어에 능통해 직접 연설하게 됨.
기자들은 그의 연설을 듣고 만장일치로 한국지지 결의문을 채택.

이 연설문의 전문은 다시 William T. Stead에 의해 만국평화회의보에 실려졌고
많은 언론인과 운동인들을 자극하게 된 사건이 되었다고.

재미있는건 이위종 열사가 전주이씨라 고종과 친척쯤 된다고 생각했던 서구의 언론인들은
이위종 열사를 prince 라고 보도하기도 했다고 함.
사실 전주이씨 이긴 하지만 광평대군파라 고종과는 아주 먼 사이.

비록 William T. Stead는 1904년 맺어진 영일동맹 때문에 일제를 비난하는 것은 꺼려했다고 하지만
그 의의는 충분히 높이 평가할만한 가치가 있음.

William T. Stead는 아직까지도 언론계의 참언론인 이미지로 남아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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