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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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장교길들이기 하극상사건으로 알려져있는데 


상병장 등 군대내 실세와 신임간부의 대립에서 벌어진 일로 

현재는 모르겠으나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신임장교들은 병사들에게 쏘가리라며 비하당했었는데 이전에는 더더욱 심각했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임장교,신임부사관 등 신임간부 vs 상병장 등 실세의 대립은 개그프로 유머1번지의 코너중 하나인 동작그만에서도 볼 수 있다.


사건 발생한 부대는 아니지만 이러한 초임간부 길들이기에 대한 여러 사례가 신문에 실리기도 하였는데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121200289103006&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12-12&officeId=00028&pageNo=3&printNo=2092&publishType=00010


- 한 탄약대대의 신 모 병장이 탄약소대장 김 모 중위에게 "요즘 대대에서 독촉하는데 좀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다."라며 반말로 빈정댐

- 한 포병대대 고참병사들이 취침점호 횟수 증가 및 경계근무 편성을 선임하사에게 일임해달라고 포대장 조 모 중위에게 요구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주일간 경례를 하지 않고 지나치는 무언의 시위를 함

- TV시청을 하던 하사에게 일직사관이었던 소위가 "TV시청 시간 준수하라"는 요구에 반항하여 집단구타

- 한 연대의 통신소대장의 한 병장이 근무시간에 사무실에서 라면을 끓여먹는 장면을 이 모 소위가 지적을 하자 병장이 멱살을 잡고 불에 달구어진 난로 뚜껑을 들고 "참견말라"고 위협

- 서 모 병장 외 여러 고참병들이 후임병들에게 "소대장 길들이기"에 대한 강의를 하였는데 "군대생활 편하게 하려면 소대장 지시사항에 대해 무조건 모른체하고 째려보고 자꾸 시비를 걸어라"라고 선동을 함

- 조 모 병장 외 3명은 소대장이 업무에 미숙하고 요령만 피운다는 이유로 '소대장에게 인사하지 않기, 소대장 지시라도 고참병들에게 허가받기'를 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러한 초임간부들 길들이는 관행들이 군대 내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던 상황이었다.


사건발단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806958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92900209103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4-09-29&officeId=00020&pageNo=3&printNo=22640&publishType=00010#


신 모 병장이 이등병을 구타하던 것을 본 이 모 소위가 "애를 왜 때리나! 차라리 날 때려라"라고 하자 "그럼 못때릴거 같냐?"라며 신 병장이 이소위의 뺨다구를 후려갈기고 분노한 이소위가 신 병장의 멱살을 잡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이 소위를 집단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피해자인 이소위는 중대장에게 사건을 보고했으나 중대장은 신병장 등에게 얼차려를 주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런 미온적 대처에 소대장들이 집단으로 항의하였으나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보고만 하였다.


이러한 대처에 빡친 조한섭 소위(학군단 32기)가 김특중 소위(육사 50기)와 구타당한 이소위를 만나 '우리가 희생해서라도 군기강을 바로잡자'고 제의했으나 김소위만 찬성했고 구타당했던 이소위는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조 소위는 이 사건을 여론에 알리기 위해 무장탈영을 결심했고 수송수단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현대 프레스토를 가지고 있던 황정희 하사에게 제의를 한다. 황하사도 병사들에게 따돌림당하던 상황이라 동의를 하였다.


9월 27일 새벽 2시경 조 소위는 M16 2정, 수류탄 6발, 수백발의 탄을 챙기고 근무중인 해안초소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왼손에 수류탄, 오른손에 소총을 든 상태로 취침중이던 소대원들을 꺠워 따라오지 말라고 일갈한 뒤 차를 타고 초소를 떠났으며 평화주유소에서 김 소위와 합류했다.


이후 양산시 원동면 태봉마을에 숨어들었다가 쫓아온 군경수색대에 의해 김 소위와 조 소위는 오후 1시경 투항을 하였으나 황 하사는 4일동안 도망치다 체포되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101400099135009&editNo=16&printCount=1&publishDate=1994-10-14&officeId=00009&pageNo=35&printNo=8899&publishType=00010


이후 재판에서 김 소위와 조 소위는 순순히 투항했다는 점 때문인지 징역 7년을 선고받고 황 하사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상관폭행했던 신 병장 등은 징역 7년-10년을 선고받는다.


김특중 소위는 사건으로 불명예 전역처리 되었지만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특별 복권되어 중위로 예편처리되었고 이후 사관학교 전문학원에서 수학을 강의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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